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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정공>건곡선생묘표(虔谷先生墓表)
虔谷先生墓表 公諱瑜姓趙氏淳昌人號爲虔谷虔谷者淳之里名而公之所退遯云公生于麗季歿于國初迄于今三百餘年而其間世運累遷文獻無徵其事蹟之可傳者皆無得而詳焉其可稽者曰公之 高祖諱璋檢校大將軍門下侍中生諱洪珪密直副使 贈版圖判書生諱佺文科追封玉川府院君生諱元吉文科檢校門下侍中與鄭圃隱廢辛昌策勳封玉川府院君是爲其考而凡三娶夫人公其第二夫人復興趙氏出也在前朝時司馬文科官至副正入我朝累徵以靈光郡事檢校判漢城尹皆不就卒葬在順天住巖乙坐原公幼有至誠喪母能致哀謹禮父歿躬負土營葬遷其母以祔後又居繼母憂如其所生母前後喪皆廬墓三年日匍匐哀省風雨不廢柴毀骨立見者莫不感動事聞我 世宗命旌之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公既自以王氏舊臣終不肯復立本朝隱居自廢累徵不起晩自虔谷又移順天之謙川放浪林泉潔身以終其遺墟俱在焉其在虔谷麗朝進士朴綏嘗過而留詩與吉注書並擬而有忠孝雙全此一廬之語後至 肅宗丙戌南士又建祠謙川以爼豆之至今談公者皆稱爲趙副正不敢以 本朝官職加焉嗚呼夫仁莫大於父子義莫重於君臣而公於此二者其所立如彼卓行峻節既足以炳烺千古則亦豈無所本而然歟惜乎世代逖遠其言論文字無所傳於世也配鞠氏同塋有二子叅議斯文兵使崇文叅議之子智山智崑智崙智崗皆以孝友聞兄弟同被以臥扁其亭曰相好湛樂以終兵使之子曰哲山父子當光廟之世同與六臣之禍遂從以死噫公之忠孝不獨在於其身而能世于其家如此又何盛耶公之墓舊無表十三世孫相賢以其父持平公宗溥遺意請文於余余歎君之篤於追遠而感公 之高風謹書此以爲萬世臣子之勸 安東 金元行 撰 逸吏議渼湖 건곡선생묘표(虔谷先生墓表) 공의 휘는 유(瑜)요, 성(姓)은 조씨(趙氏)인데 순창인이다. 호는 건곡이니, 건곡은 순창의 마을 이름으로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다.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에 졸하여 지금으로부터 三백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세상 운이 여러 차례 변했으며, 또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고, 전해온 사적(事蹟)이 없어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오직 상고할 수 있는 것은 공의 고조(高祖)는 휘가 장(璋)으로 검교대장군 문하시중인데, 휘 홍규(洪珪)를 낳았다. 홍규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고, 휘 전(佺)을 낳았다. 전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천부원군에 추봉(追封)되고 휘 원길(元吉)을 낳았다. 원길은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문하시중으로, 정 포은과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책훈(策勳)되어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인데, 모두 세 부인을 두었으니, 공은 두 번째 부인 복흥조씨(復興趙氏) 소생이다. 공은 고려 때 사마문과(司馬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조선에 들어와 여러 차례 영광군사와 한성판윤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졸하자 순천 주암 을좌(乙坐)에 장례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정성이 있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여 상례를 다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신이 흙을 져다가 쌓아 장례하며, 그의 어머니를 함께 부장(祔葬)하였다. 후에 또 계모의 상을 당해서도, 생모와 같게 하였는데, 앞뒤의 상에 모두 여묘 三년을 살고 날마다 포복하면서 슬퍼하고 묘를 살폈으며,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몸이 앙상하게 말라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이런 사실 이 조정에 알려지자 세종께서 정려를 내려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閭)」라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왕씨의 구신(舊臣)으로 자처하여 끝내 다시 조선에 벼슬하려 하지 않았 고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건곡에서 순천 겸천으로 옮겨 산수(山水)사이를 방랑하면서 몸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켰는데, 지금도 그 유허가 모두 남아 있다. 그가 건곡에 있을 때 고려 진사 박수(朴綏)가 일찍이 그 곳을 지나다 시를 지었는데, ‘주서(注書) 길재(吉再)와 비슷한 충효를 겸비한 집’이라는 말이 있다. 그 후 숙종 병술년에 남쪽 지방 선비들이 또 겸천사(謙川祠)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지금까지도 공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부정」이라 하지, 감히 조선에서 내린 관직을 부르지 못하고 있다. 아아, 인(仁)은 부자 사이보다, 더한 것이 없고 의(義)는 군신(君臣)사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 공은 이 두 가지를 그처럼 이룩해서 탁월한 절개가 이미 천고에 빛나고 있으니, 어찌 근본한 바가 없이 그렇겠는가. 애석하게도 세대가 요원하여, 그 언론 문자(文字)가 세상에 전하지 않고 있다. 배(配) 국씨(鞠氏)는 같은 무덤이며, 아들은 둘인데 참의 사문(斯文)과 병사(兵使) 숭문(崇文)이다. 참의의 아들은 지산(智山) 지곤(智崑) 지륜(智崙) 지강(智崗)으로 모 두 효도와 우애로 알려졌는데, 형제가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그 정자를 상호정(相好 亭)이라 편액하고 즐기면서 세상을 마쳤다. 병사의 아들 철산(哲山)은 부자가 세조(世祖)때 사육신의 화를 입어 따라서 죽었다. 아! 공의 충효는 비단 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그 집안을 그렇게 하였으니, 어찌 그리 성대한가. 공의 묘는 전에 묘표가 없었는데, 十三세 손 상현(相賢)이 그 아버지 지평공(持平公) 종부(宗溥)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나에게 묘표를 청하였다. 나는 그의 조상을 추모하는 독실한 정성에 탄복하고, 또 공의 높은 풍도에 감격하여 삼가 이렇게 적어 만세토록 신하된 사람들을 권면한다. 안동(安東) 김원행(金元行) 지음 유일(遺逸) 이조참의(吏曹叅議) 호는 미호(美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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